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학살 (문단 편집) === [[전남대학교]] 앞에서의 폭력 === '''18일 오전 10시'''에 휴교령 중인 [[전남대학교|전남대]] 정문에서는 몇몇 학생들이 계엄 확대와 휴교조치에 항의하면서 돌을 던지고, 이에 특전사 대원들은 학생들을 향해 함성을 지르며 돌진하여 해산을 시도했는데, 일부 특전사 대원들은 학생들이 던진 돌에 다친 데 분개하여 도주하는 학생들을 쫓아가 진압봉으로 어깨, 머리 등을 가격하고 체포한 학생들을 난폭하게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특전사 대원 7명과 일부 학생들이 부상당했다.[* <5.18 관련 사건 조사결과> 58페이지, 1995.7.18 서울지방검찰청, 국방부검찰부] 그 후에도 학생들은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33대대는 진압을 위해 2개 지대를 동원하고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을 내렸다. 학생들이 도망가자 이들은 쇠심이 박힌 진압봉을 들고 인근이나 집까지 찾아다녔다. 근처에서 지나가던 버스에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학생들까지 7공수여단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계엄군은 신분을 밝히고 다가간 전남대 교수까지 폭행했다.[*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62쪽.] 그러나 전남대 정문 앞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던 '''18일 오전 10시''', 전남대 후문, 조선대, 광주교대에서는 반란 특전사 대원들의 일방적인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 >"공수부대원들이 버스에 올라오더니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런 후 젊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끌어내렸다. 나를 포함해 20명 가량이 전남대 후문 담 쪽으로 끌려갔다. 담벽에 서서 또 한 번 구타를 당한 뒤 구내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잠시 후 학생이 아닌 게 확인돼 풀려났으나 후문을 빠져나오면서 또 한 차례의 구타를 당했다." >---- >범진염 씨 증언[* 당시 범진염 씨는 시내버스를 타고 전남대 후문을 지나가던 중 변을 당했다.][* 『정사(正史) 5.18』, 광주매일신문 정사 5.18 특별취재반 엮음, 1995, 149~150쪽.] >"시내버스가 조선대 앞에 이르렀을 때 주민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고 버스에서 내렸다. 정문에는 대위의 지휘를 받는 공수부대원들이 포진해있었다. 조금 안쪽을 보니 '''학생 1명이 가로수에 묶여있었다. 군홧발로 채이고 곤봉으로 구타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못한 주민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절뚝거리며 나오는 학생을 자취방에까지 안내해줬다. '''자신 말고도 여러 명의 학생이 영문을 모르고 등교하다 곤욕을 치렀다'''는 얘기를 들었다." >---- >임낙평 씨 증언[* 『정사(正史) 5.18』, 광주매일신문 정사 5.18 특별취재반, 1995, 150쪽.] >"오전 10시께 젊은 학생이 교대 쪽으로 오자 공수부대원 3명이 그를 잡기 위해 쫓아갔다. 도망가던 학생이 멈춰서자 그들은 다짜고짜 진압봉으로 뒤통수를 내리쳤다. 쓰러진 학생의 어깻죽지를 내리친 뒤 학생을 인근 공터로 끌고 가더니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개머리판 등으로 구타한 다음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떠나는 것을 보았다." >---- >전계량 씨 증언[* 당시 전계량 씨는 광주교대 앞에 거주하고 있었다. 5월 21일 계엄군의 조준사격에 아들 전영진 군을 잃은 그는 5.18 유족회 초대 회장이 됐다. 이 때문에 그는 [[전두환]] 정권 시절 내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고 한다.][* 『정사(正史) 5.18』, 광주매일신문 정사 5.18 특별취재반 엮음, 1995, 151쪽.] >[[광주교육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임영남 씨는 평소처럼 [[테니스]]를 치기 위해 대학체육복을 입고 학교에 왔는데, 특전사 대원 중 한 군인이 임영남 씨를 불러 놓고 다짜고짜 발을 걸고 넘어트리고는 군홧발과 몽둥이로 온몸을 구타했다.[* 『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번호 6001, 현사연 엮음, 1990, 1023쪽.] '''18일 오전 11시'''쯤 계엄군은 독서실에 올라가 가만히 입시 준비하던 고교생들을 구타했다. 이유 없이 매를 맞아서 학생들은 독서실에서 울고 있었다.[* 중앙일보 취재기록. 출처: 5 18 특파원 리포트, 183.] 학생들은 시내로 몰려들고 시내에서 파출소에 돌을 던지거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경찰들의 진압에 따라 무너지거나 흩어졌다. '''18일 14시 30분''', 대학생이 중심이 된 시위대는 10~20명 단위로 시내에서 배회하는 수준이 된다.[* 육군 제2군 사령부, 상황일지, 1980년 5월 18일자, 마지막 부분.] 공수부대 시내 투입은 전혀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정웅]] 31사단장한테 지시를 했으나, 정웅 31사단장은 오히려 육군 31사단 투입거부 7공수특전여단 시내 투입을 막으려 하다 보직에서 해임됐다. 덕분에 육군 31사단은 시위 진압에 투입되거나 동원되지 않았다. 7공수여단이 아직 시내 출동하기 전일 때, 계엄사령부는 동국대 주둔 중인 11공수특전여단 증파를 결정한다.[*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7쪽.] 현지의 전남북계엄분소는 요청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러했다. '''18일 오후 3시 30분'''쯤 유동삼거리 쪽에 1개 중대 반란 특전사 병력이 나타났고 시민들의 눈에 들어왔다. 이 때만 해도 시민들은 '시위 진압'이 아닌 '무차별 살육' 혹은 '폭동적 진압'이 일어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5.18 광주민중항쟁연구 93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